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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부터 신경쇠약에 걸렸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신경쇠약을 일컬어 가장 현대적인 문명병이라고 부릅니다. 신경쇠약은 말 그대로 정신이 쇠약해졌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이 오늘날과 같이 쇠약해진 근본적인 원인은 문명의 발달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정신이 이룩한 문명의 진보 때문에 인간의 정신이 쇠약해졌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발상입니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들의 이 같은 진단은 적중했습니다. 문명은 인간의 정신을 나태하게 만들었고, 우매하게 만들었습니다. 과학과 기술과 산업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삶은 외형적으로 더욱 편리해졌지만, 안락한 삶에 젖어버린 인간은 치열한 정신력의 극복보다는 손에 잡히는 이기(利器)의 도움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다움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다움을 상실한 인간은 스스로를 불신하게 되었고, 자기도 믿지 못하는 나를 사람들 앞에 내보인다는 것에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신경쇠약의 본질입니다.
신경쇠약은 불치병입니다. 신경쇠약엔 약이 없습니다. 신경쇠약은 세균에 의해 감염되는 질병이 아니므로 예방백신도 없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신경쇠약 증세가 나타납니다.
신경쇠약이 두려운 진짜 이유는 특별한 증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병은 육신을 힘겹게 하지 않습니다. 단지 조금 나태하게 만들고, 무감각하게 만들뿐입니다. 그러다가 병이 조금 깊어지면 신경쇠약증 환자는 판단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도덕적 불감증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 접어든 신경쇠약증 환자는 무조건 자기만 옳다고 착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만 외롭고, 자기만 힘들고 자기만 피곤하고, 자기만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다음 단계로 병이 진행되면 분노증세가 나타납니다. 외롭고, 힘들고, 피곤하기 때문에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별 것 아닌 일에도 화를 참지 못하고, 가족과 친구의 사소한 실수를 묵과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에겐 한없이 너그럽고 인자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현재 영국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도덕적 광기' 의 극단에 접어듭니다. 도덕적 광기는 신경쇠약증 최후의 증세입니다. 이 단계에 접어든 환자는 기존의 모든 도덕적 관념과 이성과 세계관을 부정합니다. 마치 자신에 의해 이 세계가 새롭게 창조되어야 한다는 듯 행세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미국문학이 보여주는 유물론적 광기와 열광은 신경쇠약 증세의 마지막 단계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융성하다가 순식간에 열기가 사그라지고, 작은 일에 광적으로 분노하다가 순간적으로 웃음을 터뜨리는 식입니다.
정신병원을 탈출한 신경쇠약증은 문학과 미술, 사회, 정치 종교, 교육 등 인류가 힘들게 쌓아올린 모든 분야를 빠른 속도로 잠식하고 있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혁명이란 말은 신경쇠약증 환자들이 만들어낸 표현이며 내가 보기엔 무참한 퇴보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인류는 그 동안 한 차례도 경험해보지 못한 정신병력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신경쇠약증을 예방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정상적인 직업과 평화로운 가정생활입니다. 신경쇠약증 환자의 대다수가 화가나 시인, 음악가 같은 비정규적인 직업의 종사자임을 감안하기 바랍니다. 더구나 이들은 가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내적인 건강만이 열풍처럼 불어 닥친 신경쇠약의 유행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것입니다. 이 질환은 처음 시작되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사라질 때도 순식간일 것입니다. 만에 하나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해 신경쇠약증에 걸린 것 같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육체적 수단과 두 가지 정신적 수단을 동시에 복용하기 바랍니다.
먼저 세 가지 육체적 수단은 충분한 수면과 신선한 공기, 적절한 운동, 그리고 알콜과 육식의 섭취를 줄이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 정신적 수단은 보다 지적인 향상을 바라는 나에 대한 믿음과 지성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다섯 가지 외엔 신경쇠약증을 치료할 만한 다른 수단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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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힘을 함부로 낭비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 그런 행위는 정열을 방해하는 것이다. 10년만 그렇게 살아보라. 의지는 찾아볼 수가 없고, 생각하는 것마다 시큼떨떨한 뒷맛이 따라다닌다. 마음속에 감추고 있던 근성도 시들어버린다. 좌절은 덤이다. 젊은이는 이를 깨닫지 못한다.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실만 믿고 마음 가는대로 행동한다. 이런 경험이 쌓여 젊은이는 인생을 배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게 되었을 때, 정력은 쇠잔하고 열정은 사라졌으며, 행동하는 법은 까맣게 잊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서른 살의 일개 노동자, 단순한 호사가를 자처하는 자기 모습에 실망하게 될것이다. 이도 아니라면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탕진한 채 돌아오지 않는 청춘을 그리워하는 패배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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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고 싫음은 개인의 능력이 아닙니다. 다만 좋다고 느끼는 감정과 능력 사이에 우호적인 관계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특히나 좋고 싫은 감정이 외부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생긴 것이 아니라면, 즉 내면에서 자연스레 발현된 기분이라면 신뢰할 만합니다. 훈련 때문에 그 사람의 감정이 완전히 무시되는 것도 폐해입니다. 심한 경우 특이한 재능이 훈련에 깔려 사라져버리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위험성은 스스로 자진해서 부과한 엄청난 양의 훈련보다는 사회통념에 의해 강압적으로 부과된 훈련일 때 더욱 커집니다.
지적 생활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해왔습니다. 이 훈련은 필수불가결한 동시에 내적인 감정을 충분히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적 훈련의 기준은 내적인 법칙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이 훈련의 주체는 자기 자신입니다.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훈련을 쌓는 주체성이 요구됩니다. 따라서 타인의 의견과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잘못된 게 아닙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내적인 욕망을 따라가는 데 우리는 필연적으로 거부감을 느낍니다. 정신의 거부반응입니다. 특별히 선천적으로 정신이 무능력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몸에 밴 일상이라는 습관, 나날의 고민들에 짓눌려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런 종류의 거부반응에는 주의해야 합니다. 만약 이런 기분에 휩싸였다면 자기반성과 충분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미술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상의 편한 생활에 길들여져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재능을 깨닫지 못합니다. 혹은 그 재능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미술이라는 지적 활동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그러던 어느날 "지금 당장 너의 평범한 생활에서 벗어나 화가가 되는 건 어떤가?"라는 하늘의 음성이 들렸다고 가정해봅시다. 과연 그는 이 음성에 네, 라고 답할 수 있을까요? 후천적으로 익숙해져버린 일반인의 습성이 이 음성에 긍정적인 답변을 들려주는 게 가능할까요? 아마도 그의 삶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안 돼, 그림은 아무나 그리는 게 아냐. 넌 재능이 없단다. 설령 있더라도 이제 시작하려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너를 단련하고 다듬어야 되는지 아니? 너 같은 게으름뱅이에겐 무리야. 헛된 꿈은 여기서 접자. 넌 더 이상 젊지 않아."
이것은 사실 하늘의 음성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감춰진 실체가 참다못해 토해내는 외침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정신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안의 목소리인 동시에 대자연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우리가 타고난 본성으로부터 떠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쉽지 않습니다. 가볍지도 않습니다. 작가가 되고 싶고, 화가가 되고 싶고, 음악가가 되고 싶지만 생업이라는 절체절명의 숙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른 직업을 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렇게 한 해, 두 해, 십 년이 흘러버리면 우리는 예전의 찬란했던 재능은 사라지고 없다는 자포자기에 다다릅니다. 재능을 버리고 생업을 택하는 건 나약한 인간의 한계인지도 모릅니다. 그 한계에 절망한 나머지 우리는 이 지루한 일상의 습관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지적 생활의 정신적 기반은 훈련입니다. 이 훈련은 매우 독특해서 정답은 없습니다. 참고서도 없습니다. 각자의 개성을 따라가는 것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즉 독창성입니다. 자기 개성에 맞는 독창적인 훈련을 찾아내는 게 중요합니다. 독창적인 지적 훈련은 상황에 따라, 나의 성장속도에 따라 행동규범에 변화를 줍니다. 마치 진보한 민주국가에서 법률이 끊임없이 개정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흘러간 세월을 돌이켜봤을 때 가장 씁쓸한 것은 돌아오지 않는 귀중한 시간들이 눈깜짝할새에 지나가버렸음에도 지적 훈련이 턱없이 결여되어 있음을 깨닫고 후회하게 될 때입니다. 그 때문에 아주 가끔 찾아오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어이없이 상실하곤 합니다.
"나는 인생이라는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여 어떤 일에 대해서도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갖췄다.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실행에 옮기기 전 나는 필요한 훈련을 끝마쳤으며, 결국 내가 원하는 수준의 성공을 맛보았다."라고 만년에 고백할 수 있는 삶은 흔치 않습니다. 그들이야말로 행운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중략)
이를 종합해서 생각해보면 지성의 광채와 이를 뒷받침하는 고귀한 정신력은 무엇이 먼저라고 말하기 힘듭니다. 강인한 정신력이 지적 능력을 성장시키고, 성장한 지적 능력은 정신을 단련시킵니다. 이 둘은 동시에 진행되며, 동시에 서로를 잉태하는 인간의 가능성인 것입니다.
나한텐 이 책이 천로역정이야 백만 아씨들 안부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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