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까지 의사로 일하면서, 인생 계획을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런 사람은 자녀들 인생까지도 그런 식으로 계획하려고 한다. 그리 생각하는 게 무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살면서 정말 나쁜 일을 당해본 적이 한 번도 없고 모든 일이 기대한 대로 풀린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러다가 상실을 경험하게 되면 그것이 본인의 자아정체감이나 인생의 이정표와 관련이 클수록 받아들이기가 더 힘들어진다. 나는 시험에 떨어지면서 계획이 일시적으로 틀어졌다. 주도면밀하게 그려놓았던 인생 계획이 어그러졌다. 누가 만들어준 계획은 분명히 아니었다. 오로지 내 생각만으로 만든 계획이라고 믿었다. 나도 어쩌면 대니얼처럼, 아버지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게다가 이미 돌아가시고 세상에 있지도 않은 아버지였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계속 나타나고 있던 균열을 적당히 땜질만 하며 수습하고 있었다. 그때는 길을 잠깐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고만 생각했고, 다른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 정말 필요했던 약은, 운명이라 생각했던 길에서 완전히 탈선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후에 깨달았지만, 삶이라는 열차가 탈선하여 내달리는 그 혼돈의 순간에는 때로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앞으로 무엇을 바꾸면서 살아야 할지, 너무 늦기 전에 생각해보라는 메시지다. 그런 의문에 답할 수 있다면,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자신이 스스로 정한 목표는 이룰 가능성도 더 높은 법이다.
2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나는 깨닫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 모든 결점과 허물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심리치료사들은 자기애에 대해 이야기한다. 간혹 자기애를 이기심과 같은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둘은 다르다.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진정으로 남을 아껴줄 수 있으려면 자신을 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백 번 틀리지 않다. 자신만의 장점을 인정하고, 단점을 시인하고, 받아들이며, 그 모든 것을 평온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이미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온 선택들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차츰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선택을 더 이상 하지 않는 건 물론 아니었다. 특히 연애에 성급히 빠져드는 문제는 고쳐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달라질 수 있을 듯 했다.
3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내 결혼 생활의 부족한 점을 직시하지 못했던 건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차츰 깨달았다. 내 삶도 정서적으로 '보류된' 상태였던 것이다. 미래가 뒤로 미루어진 상태였다.
나는 물방앗간 집 옆 바위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며 제니퍼를 생각했다. 바람에 이는 파도의 물보라, 바다 건너편에 수면과 맞닿아 있는 자줏빛 산들, 넋을 빼앗길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는 외로움의 아픔이 어떤 것인지 안다. 그것은 남은 평생을 혼자 살게 되리라는 두려움이었다. 아침에 옆에서 자는 연인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눈을 뜰 일이 없게 되리라는 두려움이었다. 이제 저녁 식탁에서 내가 정치인들이 의료제도를 개악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릴 때 공감해줄 사람도, 나를 안아주면서 일 이야기는 그만하고 어서 식기 전에 먹으라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으리라는 두려움이었다. 고독사가 두려웠다. 혼자 사는 할머니가 집 주방에서 몇 주 만에 발견되었는데 '자연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배고픈 고양이들이 물어뜯어서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알 수 없다는 따위의 이야기가 남 이야기가 아닐 것 같았다.
내 환자들이 많이 그랬듯, 나도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고 단절될까봐 두려웠다. 고립, 외로움, 우울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람들과 떨어지면 그로 인해 우울해질 수 있고 회복 또한 더뎌질 수 있다. 문제는 우울해지면 남들과 대화하기도, 함께 있기도 힘들고 남들을 믿지도 못하니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고립시키곤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고립이 심해지고 그에 따라 기분이 더 가라앉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이럴 때는 단순히 사람을 다시 만나는 것이 꼭 해결책이라고도 볼 수 없다. 천성이 사교적인 사람은 다시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상대적으로 크지만, 내향적인 사람은 상호작용 과다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회복하려면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내 경우도 물론 후자 쪽이다. 우울한 사람은 세상 속에 나가 남들과 어울린다는 것에 대단히 양면적인 감정을 갖기 쉽다.
숙소 밖에 앉아 주변 경관을 응시하면서, 혼자라는 두려움과 맞닥뜨릴 방법을 조금씩 알 것 같았다. 그 두려움을 어떻게 끌어안고 견뎌내고, 이해해야 할지 조금씩 깨달았다. 글을 읽거나 쓰거나 창작하는 등의 활동을 하려면 꼭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앤서니 스토는 '고독의 위로'라는 책에서 창작을 하는 사람이건 아니건 혼자 있는 능력이야말로 그 사람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징표이며, 모든 사람이 인간관계를 훌륭하게 영위해야만 삶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다.
불교의 사상과 수행에서 유래한 '마음챙김'이라는 개념이 있다.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 내면의 자아를 좀 더 잘 알기 위해, 괴로운 생각을 억누르려 하지 말고 그대로 관찰하면서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마음챙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그날그날 반복되는 일과에 집중하다 보니 - 내가 먹을 음식을 만들고, 3킬로미터 거리의 가게를 걸어서 다녀오고, 창가 책상에 앉아 독서하고 글 쓰고, 바다 풍경을 스케치하고 하면서 - 나도 모르게 마음챙김 기법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혼자라는 게 사실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많은 사람이 외로움을 두려워한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남들과 어울리면서 감정을 나누고 걱정과 근심을 터놓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러지 못한다면 제니퍼처럼 우울해지고, 또 우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고독이라는 것 역시 끌어안을 수 있고, 심지어 즐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과 함께하는' 법을 배운다면 가능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또 내가 남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더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친밀과 고독 사이에서 누구나 각자의 이상적인 균형점을 찾아내야 한다.
4
나는 마지못해 그의 말이 맞다는 걸 인정했지만, 그런 공포스러운 감정에 사로잡힐 때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가끔 기분이 가라앉고 몸이 녹초일 때는, 무거운 추가 가슴을 짓눌러 몸을 옴싹달싹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존의 말이 맞았다. 그럴 때 나는 정말로 통제력을 잃고 현실을 벗어나 버리는 듯 했다. 대개는 잠깐이었지만, 그럴 때면 자살 충동도 다시 느껴졌다. 나는 엘리자베스 워첼이 '프로작 네이션'이라는 책에서 묘사한, 끝없는 정서적 혼돈 상태가 무엇을 말하는지 너무나 잘 안다. 내가 특히 공감한 부분은, 저자가 원하는 치료사란, 어른답게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 그리고 우울증이 심해 전화 요금도 내지 못하는 이용자의 사정 따위는 전화 회사가 신경쓰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갈 방법을 알려줄 사람이라고 한 대목이었다.
5
"지금 어머니에 대해서는 어떤 감정이세요?" 내가 물었다.
"제 어머니예요. 그러니까 물론 사랑하지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밉기도 해요. 정말, 진짜 미워요." 그리고 나를 보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제가 어떻게 그런 나쁜 말을... 신부님에게 고해성사해야 할 것 같아요."
"아니요, 전혀 나쁜 말 같지 않은데요. 본인의 감정인 걸요. 이제 그 감정을 안고 살아갈 방법을 찾아봐야죠."
6
세상에 단일한 진실이란 없다. 저마다 몇 개의 안경 너머로 각자의 삶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있을 뿐이다. 남들의 기억과 인식과 가치관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할 이유는 없다. 사람은 자기 필요에 맞는 진실을 만들어간다. 좋건 나쁘건 본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스토리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일기를 쓰면서,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만들어간다. 그러면서 우리는 과거를 조금씩 되돌아볼 수 있고, 과거가 어떻게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는지 차츰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는, 지금도 우리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과거의 횡포에 맞서 그 힘을 무력화할 수 있다.
7
3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후 존과 함께 다시 찾은 그곳은, 회청색 갈매나무와 가시금작화 수풀 사이로 새로 깔린 판잣길이 모래언덕까지 이어져 있었다. 마침내 깨끗한 모래사장에 파도가 부서지는 해변에 이르자, 나는 워시만의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차갑지만 상쾌했다. 어찌 보면 모질고 변덕스러운 바다였지만 나는 이곳에 오면 늘 기분이 새로웠다. 아이 때도 10대 때도 여름날 저녁이면 아빠와 함께 자주 와서, 바다에서 수영하는 아빠를 지켜보았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때의 장면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빠가 항상 저 모래언덕에 앉았어." 내가 존에게 외쳤다. "아빠가 여기를 정말 좋아했어. 수영을 워낙 잘했거든."
힘차게 바다로 헤엄치던 아빠의 검게 탄 어깨가 떠올랐다. 그때는 아빠와 함께 있으면 무척 안전하게 느껴졌다. 아빠가 너무 좋았다. 잠시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아빠는 바다 저쪽, 아빠가 좋아했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힘찬 모습으로 살아서, 검게 탄 긴 팔을 석양에 번들거리며 나를 향해 흔들고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물에 들어가더니 거센 물살을 헤치며 나를 향해 헤엄쳐왔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오랫동안 아버지를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아버지를 그리워할 것이다. 애통해한다는 것은, 놓아주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애통해할 수 있게 되면 잃어버린 사람을 그 사람 그대로 기억할 수 있게 된다. 이상화된 성자도, 분노와 실망을 쏟아부을 표적도 아닌, 복잡하고 현실적이면서도 매우 인간적인 존재로.
내가 가진 아빠 사진은 한 장 뿐이다. 내가 집을 떠나 대학에 가기 얼마 전에 찍은 사진이다. 아빠는 구겨진 셔츠 차림으로 서서 한 팔을 엄마 어깨에 두르고 있고, 엄마는 아빠 손을 꼭 잡아 허리에 붙인 모습이다. 나는 아빠 왼쪽으로 살짝 뒤에 서서 해를 쏘아보고 있고, 동생 이언은 우리 앞에 서 있다. 앨런은 아마 카메라를 들고 있었을 것이다. 아빠는 마치 우리가 모르고 있는 비밀을 알고 있기라도 한듯 묘한 미소를 엷게 짓고 있다. 엄마는 방금 전까지 다들 싸우기라도 한 듯 억지스러운 미소를 활짝 짓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진도 점점 빛이 바래 흑백에 가까워져가고, 내 애통한 마음도 흐릿해져간다. 지금은 알 수 있다. 나라는 사람은 결국 아빠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아빠는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행동으로 내게 변치 않는 사랑의 힘을 가르쳐주었고, 내가 지금 모습이 될 수 있게 도와주었다.
8
중요한 건 애통한 마음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상실의 기억을 떠올릴 때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괴롭고 아픔이 생생하다면 진전이 없는 것이다. 감정이 잦아들지 않고 점점 커진다면 그 역시 심각한 신호다. 애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우울증이 된다. 애통한 마음의 크기를 1에서 10까지의 숫자로 생각해볼 때 그날그날 아주 미미하게라도 줄어들고 있따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신호다. 조금씩 다시 일상을 마주하고 앞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지나간 일을 조금씩 손에서 놓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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